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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베 - 건국의 아버지에서 최악의 독재자에 이르기까지(2)

젊은 시절 무가베는 배움에 매우 열성적이었다. 그는 포트 하레 대학교(University of Fort Hare)에서 공부했는데, 이곳은 흑인들이 공부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대학 중 하나였다. 그런 까닭에 이 곳은 넬슨 만델라를 비롯, 많은 위대한 흑인 지도자들이 수학한 곳이기도 했다. 그는 이 대학에서 간디와 막스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영향을 받아 1952년 자기 고국으로 돌아올 때에는 이미 당시의 짐바브웨, 즉 로데지아의 식민지주의와 인종차별주의에 완전한 적개심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막시즘을 알고 나서부터 그는 젊은 시절 일찌기 담배와 술을 멀리 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북 로데지아(지금의 잠비아)의 수도인 루사카에서 3년간 학생을 가르치다가 가나로 옮겨가는데, 그런 와중에 가나는 1957년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최초의 아프리카 국가가 된다. 이는 무가베에게 많은 정신적인 자극이 되었다. 그리고 1961년에는 그의 아내 샐리 헤이프론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물론 샐리 헤이프론은 훗날 짐바브웨의 퍼스트 레이디가 된다.
 




마음이 많이 굳어진 탓인지, 당시 고국의 현실에 대한 중압감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샐리 헤이프론의 설명으로는 당시 무가베가 자신과 영화구경조차 한 번 안했을 정도로 낭만적인 구석은 전혀 없었다 한다. 그녀는 훗날 무가베와 다른 인사들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고, 무가베의 분노를 조절해주면서 현실감을 놓치지 않도록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92년 그녀가 사망했을 때,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유일한 친구이자 최고의 조언자를 잃었다고 평가했다.
 
그 무렵 로데지아로 돌아왔던 무가베는 이미 전사이자 선동가이면서, 식민지 부조리의 종식을 외치던 각 조직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196311월 그는 체포되어 11년의 형을 선고받는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그에 관한 두가지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그가 학구열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 그는 수감되어 있는 동안 특히 경제학과 법률에 관해 많은 공부를 했는데, 통신과정의 시험을 통해 런던대학의 학위까지 취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그의 평생의 상처 중 두 번째 일이었는데, 즉 수감기간 중이던 1966년 그의 세살배기 아들이 사망했던 사건이다. 그는 이 때 로데지아 정부에게 처음으로 간청을 한다. 반드시 되돌아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아들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자기 아내를 위로할 수 있도록 자신을 가나로 보내달라고 청했던 것. 자신의 청원이 거절되면서 당시 이안 스미스가 이끌던 솔즈베리 정권에 대한 그의 분노는 지울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1965년 이안 스미스는 영국에 대해 일방적인 독립선언을 한다. 1969년 그는 신헌법을 초안하여 국민투표 붙이고 유권자 80% 이상의 찬성을 이끌어내지만, 이미 이 정권과 적대적 관계에 있던 흑인 무장세력과의 갈등이 본격적인 국면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무가베는 그 중심에 있게 된다. 1972년부터 시작된 민족주의 게릴라 세력의 무장투장은 약 7년 동안 지속되는 과정에서 3만여명의 희생자를 낳게 된다. 당시 무가베는 50의 나이에 이르렀음에도, 일명 부쉬워(Bush War)라 일컬어지는 게릴러전에 참여함으로써, 짐바브웨의 독립운동에 귀감이 되었다.
 
다소 기이한 한가지 사실은 이 기간 동안 무가베는 훗날 영국의 수상이 된 마가렛 대처 여사와 친분을 갖게 된다. 그리고 마가렛 대처 여사는 1994년 무가베가 식민지 해방운동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영국 왕실로부터 명예 나이트 작위를 받는데 도움을 주게 된다. 하지만 이 작위는 2008년 무가베의 인권탄압을 구실로 다시 취소되는데, 영국왕실의 작위취소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이어서 세계적인 이목을 끌기도 했다.
 
흑인들의 독립투쟁은 마침내 1978년부터 결실을 맺기 시작한다. 흑인세력이 점점 강화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적으로도 좋지 못한 평판을 받고 있었던 탓에 19783월부터 스미스 정권은 흑인세력과 타협을 모색하게 된다. 그 결과 1979년 총선거를 통해 흑백 연립정권의 성격인 짐바브웨-로디지아가 구성된다.
 
하지만, 이 정권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제대로 된 적폐청산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가베는 이 정권을 백인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괴뢰정권으로 규정하고 무장투쟁을 지속하게 된다. 이 투쟁은 마침내 1980년 총선을 이끌어내고 이 선거에서 전체 의회 100석 중 무가베가 이끄는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연합(ZANU)57석을, 동맹 투쟁세력인 짐바브웨 애국전선(ZAPU)20석을 얻는 대승을 하게 된다. 그 해 4월 대통령에 카나안 바나나가, 총리에 무가베가 각각 취임하게 되고 이로써 짐바브웨는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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