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바브웨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하루 전날 밤, 무가베는 사모라 마셸(Samora Machel) 모잠비크 대통령에게 한가지 충고를 듣는다. “만약 백인들을 짐바브웨에서 서둘러 떠나가게 만들면, 파멸할 것이다.” 평소 백인들에 대한 적개심을 감추진 않았던 무가베였지만, 그는 이 진심어린 충고를 받아들인다. 그의 정치지도자로서의 첫 걸음은 백인들에 대한 수용정책으로 시작한다.
불과 몇 주 전까지 그를 ‘사탄의 사도’라고 까지 일컫던 이안 스미스 전직 남 로디지아 대통령에 대해 어떠한 제약도 가하지 않았다. 스미스 대통령은 1965년 “소수 백인들은 향후 천년 동안 절대로 권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인종차별적인 권력지향을 스스럼없이 드러냈던 인물이다. 그는 1987년 무가베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정치활동 금지를 당하면서 정계를 떠나기까지 여전히 야당 지도자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심지어 불과 몇 달 전까지 무가베를 살해코자 했던 로디지아 정보국장을 그 자리에 유임시키는 아량을 보이기도 했다.
무가베 1979년
하지만 그의 이러한 관용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짐바브웨에서도 새로운 권력자 무가베를 암살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었다, 여기에는 남아프리카 안보국 요원들이 포함된 사례도 있었는데, 이들이 짐바브웨의 백인들과 연루가 되어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백인 짐바브웨인들은 로디지아로의 회귀를 조장하면서 무가베에 대한 불만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낀 백인세력의 무가베에 대한 비난과 준동은 그가 권력을 잡은지 대략 10여년 동안 지속되어 왔다.
하지만 무가베에게 더욱 불편한 것은 당시의 토지소유 관계였다. 그가 권력을 잡을 무렵 짐바브웨에서는 6천여명의 소수 백인들이 전체 농지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대부분 가장 비옥한 지역의 땅이었다. 사실상 로디지아 정권 하에서 백인들이 흑인들을 축출하고 가져간 토지인만큼 이 부분에 대한 흑인 짐바브웨인들의 불만은 매우 큰 상황이었다.
무가베는 흑인들의 불만해결을 자신의 정치적 슬로건으로 채택하기에 이른다. 동시에 이것은 백인들에게 커다란 위협이기도 했다. 그의 정치적 슬로건은 영국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토지구매에 나서는 작업으로 시작되지만, 정작 이 사업은 정권과 결탁된 지주들의 잇속을 채워주는데 그치게 된다.
1997년과 2000년에 결정된 토지 강제몰수 정책은 급기야 짐바브웨 고용의 3분의 1가량, 수출 금액의 40%를 차지했던 짐바브웨 경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게 된다. 자본력과 고용력이 뒤따르지 못했던 이 정책으로 인해, 짐바브웨는 농업생산이 급격히 떨이지게 되고 이 때부터 본격적인 경제파국의 길을 걷게 된다.
이 과정에서 짐바브웨의 백인 인구는 독립 20여년만에 5분의 1 수준인 4만여명으로 줄어들면서 완전한 소수인종을 형성하게 된다. 무가베 역시 노골적으로 인종주의적인 표현과 정책을 서슴지 않게 되는데 본인 스스로 “하얀 악마들”, “우리의 진정한 적”이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이다. 짐바브웨 독립 전까지 경제적 실력자이던 백인들의 갑작스러운 이탈은, 그들만의 이탈뿐만 아니라 그들이 지니고 있던 경제력의 이탈도 함께 의미하는 것이어서, 짐바브웨의 경제적 몰락은 이미 예약된 것이나 마찬가지 상태였다.
하지만 정작 무가베의 진짜 정치적 희생자들은 흑인들이었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적어도 1만명 이상의 일반 민간인들이 희생하면서 이는 짐바브웨의 “제 2차 내전”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가 됐다. 특히 그는 또 다른 짐바브웨 독립 전사였던 짐바브웨 아프리카 국민연합(Zapu)의 지도자 조슈아 은코모와의 대립 과정에서 커다란 비극을 만들어낸다.
일찌기 독립운동 당시 무가베는 은코모를 일컬어 “나약하고 전략을 갖지 못한 인물”로 평가할 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980년 선거에서 무가베는 은코모의 아들과 경선하게 되고, 승리한다. 선거 후 무가베는 독립 기념식장에서 은코모에게 말단 좌석에 앉히는 수모를 주기도 했다.
마침내 무가베는 은코모를 지지하던 메타베렐랜드(Matabeleland)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에 나서게 된다. 1983년, 북한 50여단의 지원을 받아 짐바브웨 인민군(ZNU) 보병여단이 이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에 나서게 되면서, 감금, 재교육 캠프로의 강제 이동, 즉결처분등과 같은 탄압이 시작되었다. 약 2년여에 걸쳐 2만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산채로 농민들을 불태우거나, 생모 등 뒤에서 어린 아이 눌러 죽이기, 친척의 무덤 앞에서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연합애국전선(ZANU-PF)의 노래시키기 등을 자행했다는 잔혹한 얘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1987년 쿠쿠라훈디 대학살 이후 은코모는 더 이상의 학살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자신이 이끌던 정당 ZAPU를 ZANU에 통합시키고 정계에서 은퇴하게 된다. 이로써 짐바브웨는 사실상 통합 정당인 ZANU-PF가 이끄는 일당 체제로 전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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