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의 삶이 온통 한 국가의 독재자에만 머물렀다면, 르몽드 인터넷판이 그의 부고를 제일 머릿기사로 올리는 일 따위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우기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이 앞을 다투어 그의 삶을 칭송으로 마무리해주는 일은 더 더욱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9월 6일, 짐바브웨의 전직 대통령 무가베의 죽음이 전해지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라마포사 대통령은 가장 먼저 논평을 내어 “식민지주의에 대항했던 아프리카 운동의 주창자”에 경의를 표했다. 그럼으로써 무가베가 오랬동안 이웃국가인 남 아프리카 공화국의 반 아파테이드(인종차별정책) 내지는 독립운동을 지원해왔음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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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의 무가베, 런던, 영국, AP |
나미비아의 하게 게인고브 대통령은 “그의 희생이 인종적 멍애와 식민지 압제로부터 남아프리카의 해방을 가능케 했다” 면서 “나미비아 국민들은 그에게 깊이 감사한다”는 말로 애도를 표했다. 남아프리가 개발공동체(SADC) 현직 의장인 존 마구풀리는 “아프리카는 행동으로 식민지주의를 거부했던 용기 있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를 잃었다”고 애도했고 카빌라, 콩고 전직대통령 또한 “아프리카는 위대한 범 아프리카주의자이자 독립투쟁의 영웅을 잃었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잠비아, 케냐, 브룬디, 나이제리아, 세네갈 등 크고 작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있는 가운데, 그가 독재자였음을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서방의 정상들이 예의상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면서도 예외 없이 독재자로서의 그의 삶에 방점을 찍어 언급하는 것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1980년 4월 18일, 셀리스베리 스테디움에서 유니온잭이 하강하고 짐바브웨의 새 국기가 올라가던 그 날까지, 무가베의 삶 자체는 온통 짐바브웨의 독립에 바쳐졌던 숭고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1924년 2월 21일, 지금은 수도 하라레가 된 당시 살리스베리의 서쪽 쿠타마에서 1924년 2월 21일 출생했다. 쿠타마는 당시 가톨릭 선교구에 해당했고, 그 무렵 짐바브웨는 영국의 식민지인 로데지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인종차별의 잔혹함을 직접 목격했을 뿐 아니라 식민지 침략자들에 대한 초기 아프리카 해방전쟁(Chimurenga)에 관한 얘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어렸을 때 그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책 읽기를 좋아하고 말 수가 적은, 그렇지만 매우 재능이 뛰어났던 아이로 당시 선교사들이 증언한 바가 있다. 그의 나이 10살에 아버지는 다른 여자를 찾아 아들을 버리게 되는데, 이 일은 무가베에게 있어서는 평생 두 가지 상처 중 하나가 되었다.
이 때 그의 아버지이자 멘토 역할을 해 주던 한 선교사의 영향을 받게 된다. 아일랜드 출신이었던 그는 무가베에게 아일랜드가 어떻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것은 영국에 저항할 수 있는 무력이라 얘기해 줬던 것으로 전해진다. 무가베는 이 말을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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