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글에서였던가, 박완서 선생님은 자식을 잃고, 그래도 밥을 먹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잔인함을 느꼈다고 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존재의 근거를 잃는다. 그래서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인 ‘먹는 다는 것’ 조차 자식잃은 부모에게는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 행위이다. 세월호의 부모들이 어떤 심정으로 하루하루의 식사를 이어갔을지, 목석과 같은 이들에게는 감히 가늠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영화 밀양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한 엄마의 이야기이다. 엄마는 유괴범에 의해 아이를 잃었다. 그 순간 엄마는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의 존재근거를 상실했다. 삶은, 어쩔수 없이 공급되는 최소한의 에너지가 의미없이 소멸했다 다시 충전되는 가냘픈 과정에 불과했다. 모든 것을 잃은 대신에 그녀에게 강제적으로 맡겨진 ‘용서할 수 있는 권리’가, 어느 퇴역군인의 누더기에 걸린 훈장처럼, 엄마에게 주어졌다.
인간은 나약한지라, 존재 근거를 잃으면 종교를 찾기 마련인가보다. 엄마는 교회를 찾았고,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존재근거를 다시 회복하고자 했다. 그리고 존재근거가 회복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는 ‘용서할 수 있는 권리를 사용하는 것’이라 믿었다. 엄마는 살인범을 용서했고, 자신의 하나뿐인 자산인 그 소중한 권리가 올바르게 사용되었음을 확인하기 위해 살인자를 방문한다.
살인자를 면회한 자리에서, 엄마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듣는다. 자신의 하나뿐인 자산, 그러니까 ‘용서할 수 있는 권리’를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대신 사용해버렸음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은 이미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범인의 입을 통해서, 이미 죄의식 같은 누더기를 집어 던진 채,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평화로운 표정의 그 얼굴을 통해, 엄마는 자신이 그 권리를 사용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대신 사용해버렸을 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이라 해도 용서를 가로챌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영화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이요 광주의 이야기이다. 용서의 권리를 도둑맞은, 그래서 아직 자신의 존재근거를 온전하게 회복하지 못한 사람의 몸부림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를 똑똑히 보아달라고 애절하게 청하는 영화이다. 그리고 배우 전도연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영화 택시운전사는 결코 독일인 사진기자와 택시운전사의 무용담에 그칠 수 없다. 제작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든간에, 이 영화는, 두 주인공의 무용담에 박수치기보다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감정을 조절해야만 하는 그런 종류의 영화이다. 이는 필경 용서의 권리를 도둑맞은 사람들의 몸부림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용서와 화해는 흔히 듣는 얘기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정작 용서를 담당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고, 이제까지 그들은 입막음을 당해왔다. 국가라는 이름의 전지전능한 신은 언제라도 용서의 권리를 가로챌 준비가 되어 있고 실제로도 호시탐탐 그것을 노려왔다. 그래서 이제껏 용서의 권리는 본래의 모습으로 행사된 바가 없었다. 분노의 이유는 여기에 있다.
마땅히 용서해야 할 사람이 용서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처절한 몸부림 속에 녹아 있다. 거의 한 세기가 다 되도록 할머니들의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건만, 국가라는 이름으로 가로채간 용서의 권리는 언제 돌아올지 요지부동이다. 국가라는 존재가 때로는 얼마나 괴물 같고 흉물스러운 것인지, 우리는 문득문득 깨닫는다. 40년을 향해가는 광주의 상처는 언제쯤이나 제대로 된 용서라는 통과의례를 지나게 될까, 영화 택시운전사가 우리에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영화 밀양과 택시운전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묻고 있는 동일한 질문이다. 또한 질문의 과정은 어렵지만 그 대답은 간명하다. 용서는 대신할 수 없다. 누군가가 가로챈 용서의 결과는 처절한 몸부림과 분노이다. 자식을 빼앗긴 부모, 위안부 할머니, 광주, 누구도 이들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들이 스스로 용서할 수 있을 때까지, 아픈 상처의 들쑤심은 완전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소녀상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상처가 잊히기 전에, 누군가가 또 다른 영화 택시운전사를 만들어낼 것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주인공의 무용담을 칭송하는 대신에, 들쑤셔진 상처로 인한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고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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